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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프를 다녀와서
소풍유감(逍風遺感)
처음 밀알에 와서 유능주 형제를 만났을 때를 생각한다. 벌써 강산이 변한
다는 1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때 그의 삶은 온통 자신의 뒤틀린 육체를 향한
도전으로 점철되어 있었다는 기억이다. 그는 되도록 휠체어를 마다한 채 걸
으려 애썼고 웬만한 계단은 걸어서 오르려는 투지를 보였다. 언어도 어눌한
대로 많은 부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무라도 그를 아는 체하면 그 얼굴은 박춘식 간사
금세 모든 주름을 동원하여 한 다발 웃음을 활짝 피워내곤 했다. 거의 자동으
로 연동하듯 피어나는 그 웃음에 나는 묘한 감동을 받았는데, 그것이 지금껏 나를 그에게 묶어주는 연
민의 고리가 된 듯하다.
특별히 그는 젊은 자매들의 출현에 환호했는데, 그가 어느 한 자매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사건은 지금
도 쓰린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 자매로 말미암아 한때 그의 삶에 대한 도전이 한층 치열해졌을 것은 당
연하리라 본다. 오히려 장애 정도가 더 심각한 자매였는데 그 어머니의 강력한 반대로 자매가 밀알과
결별하면서 형제의 얼굴에서 한때 웃음이 사라졌었다는 기억이다. 그 후 어느 땐가 여름캠프를 다녀와
서 그를 집에 태워 주었는데 그때 차에서 내려 집을 향해 뒤뚱거리며 모퉁이로 사라지던 그의 뒷모습
이 지금도 내 가슴에 짙은 여운을 남기고 있다. “아무도 맞아줄 사람 없는 공허뿐인 공간에 다시 갇히
려고 비틀거리며 가는 그의 등에 켜켜이 쌓이던 외로움을 나는 망연히 바라보았다.”라고 당시의 일기
에 쓰고 있다.
이런 능주 형제가 이번 군산 나들이에도 참석했다. 전과 달리 전혀 서지도 걷지도 못하는 그는 지금
도 마주하면 어김없이 그 청량한 홍소로 반응한다. 한층 깊어진 얼굴 주름과 거친 수염, 그리고 충혈된
눈으로 입을 벌리고 웃는 그 웃음 뒤에 담긴 느낌과 생각이 무엇일까? 나는 가끔 참을 수 없이 궁금해
지곤 한다. 그의 언어는 소음 수준으로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지경이다. 굳어진 뼈와 근육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철저히 그 자신과 봉사자의 의지를 거역한다. 충치 먹은 어금니 위의 턱을 손가락으로 가
르치며 집요하게 아픔을 호소하는가 하면, 지독한 변비로 배변을 언제 해결했는지조차 알 길이 없다.
단절과 소통 불허의 생명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그를 두고 우리는 “답이 없다.”라는 말로 탄식한다.
귀에는 늘 보청기가 꼽혀 있으나 제대로 들리는지도 의문이다. 이렇듯 말로만 그를 논할 뿐 아무 행위
도 하지 못하는 자신을 돌아보며 나는 심한 가책으로 전전긍긍한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
신 주님 말씀은 이런 영혼을 최우선으로 지적하고 있음을 아는 까닭이다.
돌아오는 날 아침에 변산 채석강 위로 타오르는 일출을 마주 보며 해변 벼랑길을 걸었다. 싸늘한 대
기 중에 어느덧 봄을 재촉하는 화신이 기웃거림을 본다. 눈송이를 얹은 나뭇가지마다 수액을 저어 올
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태동하는 생명의 비릿한 냄새가 바람 속에 섞여 있다. 마음 같아서는 밀알
가족 모두를 불러내어 함께 누리고 싶은 아름다운 자연경관이다. 그러나 절벽을 곁에 끼고 트인 길이
거칠고 가파르니 무슨 수로 저들을 동반한단 말인가? 능주 형제를 두고 “답이 없다”고 탄식하던 때에
보이시던 주님이 다시 기척을 남기신다. “나를 두고 답이 없다니 내가 없다는 말 아니냐?”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이사야 60:19)
2022년 3월 인천밀알보_ 5